Monday, July 15, 2013
은행 융자 신화
어렸을 때부터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돈이 부족해서 무엇인가를 못해본 기억은 없다. 하지만 사실 아이들도 알 건 다 아는 법이다. 게다가 부모님은 종종 '너를 우리가 없이 키우지는 않았다' 고 말씀하셨으니까, 애써 모르고 살려해도 한번씩 그렇게 집안의 재정상태를 상기해야 했다.
돈을 어떻게 벌어야할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 문제였다. 아버지가 그런 질문에 답변을 줄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대신 내게 '경제학' 책을 사주셨다. [펠릭스는 돈을 사랑해]나 [열두살에 부자가 된 키라] 같은. 씨발 펠릭스는 금화를 얻었잖아. 키라에게는 말하는 개가 있었고. 애초부터 말이 안되는 이야기였다. 설령 그들의 조언을 조금 더 합리적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길거리에서 레모네이드를 파는 일 따위가 한국의 11세 소년에게 가능할리 없었다. 그래도 쓸데없는 경쟁심은 있었기에, 나는 12살까지는 부자가 되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내 사업을 생각할 거야. 그리고 13살, 15살, 20살. 연암의 글 속 '민옹'처럼 나이만 헛먹었다.
사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다. 존나게 많이 뜯어먹었으니까. 무엇인가를 사달라고 졸라본 적은 별로 없다. 그러나 애초에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란 자식을 적게 낳아 많이 투자하는 종이다. 더욱이 내가 자라난 수도권의 신도시에서 외동아들은 [매트릭스] 속 네오보다도 기대받는 존재였다. 모피어스가 네오에게서 매트릭스를 깨뜨릴 구세주를 발견하듯, 신도시의 부모님들은 자신들의 아이에게서 신분 상승의 가능성을 엿보곤 한다. 20평 아파트에서 주상 복합으로. 샐러리맨에서 전문직으로. 나 역시도 신도시의 수많은 '네오'들 중 하나였다. 마치 예언을 해독하듯, 부모님은 내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의 단어에서 재능을 찾아내었고, 투자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매트릭스]나 성경 정도 될 줄 알았던 이야기는 알고보니 남미 신화였다: 흰 얼굴에 수염을 기른 영웅이 언젠가 돌아와 세상을 구원하리라. 정말로 흰 얼굴에 수염을 기른 사나이가 나타났을 때, 남미인들은 열광했다. 사나이가 예언 속 구원자와 얼굴이 닮았을 뿐인, 침략자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들 모두가 노예로 전락한 후였다. 오늘날 우리들은 그 시절 남미인들의 어리석음을 조롱하지만, 사실 이 부조리극은 신도시에서 한 집 건너 일어나는 일이다. 늙은 부모는 온갖 융자와 빚더미 위에 걸터앉아, 고개 숙인 자식을 내려다보며 "자식인 줄 알았는데 웬수" 라고 한탄한다.
(그 책임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선 동생이라도 낳아달라고 했어야 했다. 어릴 적에, 혼자 스케치북에 낙서를 하고 있자면 어른들이 다가와 묻곤 했다. "ㅇㅇ야. 동생 안 갖고 싶어?"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기묘한 미소가 불쾌했고, 어린 동생이 내 스케치북을 찢어버리지 않을까 두려웠던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아 그 따위 스케치북이 뭐라고. )
땡그랑 한푼, 땡그랑 두푼. 카드 회사에 돈이 굴러들어왔다. 내가 한창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던 해- 그러니까 2005년 즈음에, 곳곳의 TV에서는 카드사가 흥겨움을 감추지 못하고 부르는 콧노래가 들려왔다.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Labels:
일기
Subscribe to:
Post Comments (Atom)
No comments:
Post a Comment